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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과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정신분석/융의 분석심리학

by 셀리스트 2023. 3. 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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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과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스위스 출신의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이론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마음, 즉 인격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집단적 무의식은 전혀 의식되는 일이 없는 것이지만 인격 전체를 지배하고 종족으로 유전된 것이며 개인적 경험을 초월한 것이다.

집단 무의식은 무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개인 무의식이 '어떤 개인이 어릴 때부터 쌓아온 의식적인 경험이 무의식 속에 억압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인데 집단 무의식은 '옛 조상이 경험했던 의식이 쌓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며 경향'이라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의식적 경험은 상징을 통해 집단 무의식으로 전승된다. 그래서 융과 그의 동료, 제자들은 집단으로 전승되는 신화, 전설, 민담을 집단 무의식의 '원형(archetypes)'이 녹아들어 있는 지혜의 보고로 여겨 여러 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을 광범위하게 분석했다.

여기서 '원형(archetypes)'이란 집단 무의식의 구조적 요소, 보편적, 집단적, 선험적인 심상들이다.

 

a. 페르소나 원형 : 개인이 외계에 내보이는 이미지, 진정한 자기와 분리된 것.

b. 아니마/아니무스 원형 : 인간은 생물적으로 양성,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을 둘 다 가지고 있음.

c. 그림자 원형 :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 생각, 감정,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

d. 자기 원형 : 집단 무의식 속의 중심적인 태고유형으로서 주위의 다른 체계를 통합하여 성격의 균형과 안정성을 제공함.(가장 중요한 원형).

 

 

1.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전 인류에 공통되며 뇌의 선천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무의식(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기억과 충동을 포함하는 정신의 일부분)의 한 형태이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개인적 무의식과는 구별되며, 원형, 즉 보편적인 원초적 상과 관념을 내포한다.

쉽게 말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무의식을 의미한다. 조상들이 오랜 세월 동안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으면서 체득한 것이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결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떨어질 것 같은 공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의 공포뿐만 아니라, 특정 소리에 대한 공포, 큰 것에 대한 공포 등도 우리 모두가 대부분 느끼는 집단 무의식이다.

 

2. 집단 무의식의 원형

스위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홍수, 수메르 신화의 홍수, 중국 신화 속 홍수와 같이 역사적으로 시공을 초월한 유사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에 주목했다. 이를 아키타입(archetype:원형)이라고 불렀다.

아키타입은 인간 심리에 내재하는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기억의 본질이다. '집단 문의식의 구조 안에는 인간 심리의 원형적 건축자재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인류 전체에 관한 집합적 기억이 축적돼 있다'는 것이다. 학력을 자본으로 본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행위를 생산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아뷔튀스'라고 불렀다.

교육체계를 통해 이뤄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며 유전자처럼 상속된다고 했다.

 

3. 집단 무의식의 원형과 본능

칼 융은 마음이 병든 사람이 겪는 현상이 온 인류가 태고적부터 이어져오는 심상이나 상징의 집단적 저장고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 융은 '밤바다 모험(칼 융이 겪은 중년의 정신적 위기와 환상 체험)'을 통해 고대의 심상과 상징을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원형의 실체를 확인하였다.1919년에 융은 '원형'이라는 용어를 '밤바다 여행'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 개인적 무의식에 덧붙여, 융은 본능과 원형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 집단 무의식을 가정했다.

본능이란 필요에 의해 특정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충동으로, 이런 본능은 새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귀소 본능과 유사하게 생물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본능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융은 인식 그 자체를 통제하는 선천적 무의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원형으로 모든 심리적 과정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일종의 직관이며, 이것은 모두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본능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처럼, 원형은 개인의 이해 방식을 결정한다. 본능과 원형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이고 집단적이며, 모든 이가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원형) 의해 행동하고자 하는 충동이 결정되는 것처럼, 또한 원형을 통해 얻어진 무의식적 이해는 본능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한다. 한편 행동하려는 충동(본능)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지를(원형) 지시해 준다. 이와 같이 상호보충적으로 작용하는 원형과 본능의 관계를 융은 닭과 계란에 비유하였다.

원형은 자신에 대한 본능적 인식, 즉 '본능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의식이 '객관적인' 생의 과정에 대한 내적 지각인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4. 집단 무의식의 원형과 심상

인간은 원형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원형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며 오직 심상(image)의 형태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모든 세대와 문명에서 인류는 '현자의 원형'과의 교류를 가정하고 있다. 우리 민담에서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돕는 산신령이나 고승, 융의 경우에는 발레몬(밤바다 모험 때에 융의 꿈 해석을 지시해 준 노현자)이 이에 해당된다.

이처럼 영(Spirit)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심상을 통해 인류 전체에 공통적인 집단적 무의식의 실체가 있음을 말해준다. 융은 본직적인 실체인 원형과 원형적 심상에 구분을 두는데, 원형의 실체 존재는 정의상 무의식이기 때문에 단지 추론될 뿐이지만, 원형적 심상은 상징으로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며, 우리는 상징을 통해 원형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5. 자기(Self)와 자아(Ego)

융 사상의 핵심은 자기(Self)와 자아(Ego)의 개념이다. '자기'는 의식의 빛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바닥이자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 포괄하는 곳이다. '자아'는 훨씬 작은 세계, 의식과 분별의 세계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 어렵다.

융에게 '자기실현'이란 바로 자아가 무의식의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자기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것을 향해 가고 있다.

 

6.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

페르소나는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역할로, 우리는 그 가면을 쓰고 배우처럼 연기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 게, 사회생활을 하는 데 어쩔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멋진 페르소나(친절한, 유능한, 명랑한, 가정적인)를 가진 사람들을 특별히 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가면을 벗어야 할 상황에서조차 페르소나를 벗을 줄 모른다. 하지만, 중년에 이르면 우리는 그 '가짜'의 한계를 느끼고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참된 자신의 모습,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균열을 비집고 파괴성을 띤 채 떠오르는 게, 페르소나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다. 그림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돌보자 않았던, 부정했던 내 안의 '미지의 타자'이다. 그 한 양상이 각종 콤플렉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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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구조와 특성

융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하여 무의식의 넓은 세계를 열었다고 했다. 개인무의식은 선천성을 갖는 집단무의식과는 달리 후천성을 갖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무의식이 개인의 경험과 관련되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후천적인 특성이 저장된 정신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개인무의식은 개인이 생활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정신의 특성이 무의식에 축적되어 정신의 기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1.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기초적 이해

무의식은 의식과는 달리 쉽게 인식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무의식은 인간의 의지로 경험하기 쉽지 않은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인무의식은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존재하는 정신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무의식이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하는 정신적인 특성이 무의식에 저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이다.

 

 

1)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일반적 이해

개인무의식(persoenliches Unbewusstesein)은 단순히 의식과 대립적인 특성이기에 비교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다양한 특성을 갖고 있다. 개인무의식은 의식과는 달리 나타나지 않는 측면이 있어 쉽게 포착되지 않는 점도 있으면서도 의식과의 관련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인무의식을 이해함에 있어 무의식의 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관여하는 곳에 무의식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의 현실지각에 있어서도 무의식은 관여한다. 우리의 감각이 신체적 현상, 광경(光景), 음향에 반응할 때라도, 그것들은 모두 어떤 방법에 의해서 외부적인 현실의 영역에서 내부의 마음의 영역으로 이동해 간다. 다만 우리의 정신에서 무의식이 심리적인 사건으로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쉽사리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우리는 '무의식적인 작용'이라 말할 수 있지만, 융의 학설에 기대어 무의식이란 우리 정신의 내부에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것의 실체, 또는 의식하지 못한다는 특성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융은 이러한 무의식을 한마디로 "무의식은 참으로 무의식적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대신한다.

 

2)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학문적 이해

개인무의식은 순전히 개인적인 성질의 무의식이다. 개인적인 성질의 무의식은 후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겪은 모든 정신적인 경험을 말한다. 이런 개인무의식은 어떤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서 억압된 것들이다. 개인무의식은 또한 성적인 것들도 포함되면서 그 밖의 모든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약한 것들이 모두 포함한다.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은 무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억압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개인무의식은 무의식이라는 특성에서는 억압된 내용뿐 아니라, 의식의 문턱의 값이라는 식역치(識閾値)에 이르지 못한 모든 심리적 소재가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소재가 문턱의 값 아래에 있는 것은 억압의 원리로만 설명한다는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무의식이 반드시 억압되어 있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의식에는 억압된 소재 외에도 의식에 오르지 않은 감관 지각을 포함한 의식의 문턱 아래에 들어 있게 된 모든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의식화될 내용의 싹들이다. 다만 이 모든 무의식의 내용이 그것이 개별적인 존재가 획득한 것들이라면 개인적인 성질의 것, 즉 개인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층에 포함되어 있는 소재는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존재가 획득한 것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화할 수 있는 심리적인 요소들의 특징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과 같이 어울리지 못하는 심리적 요소가 억압되어 있어 무의식이 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억압된 내용도 일단 인식이 되면 의식화되고 의식에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이 소재가 개인적 내용이라고 인식하는 근거는 그 소재의 영향이나 부분적인 출현, 또는 그 유래 등이 개인적인 과거에서 입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정신에서 통합적인 인격의 구성요소이며, 구성의 목록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구성요소들이 의식에서 탈락되며 이러저러한 면에서 열등성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이 열등성은 기질적인 불구라든가, 선천적인 결함의 심리적 특성 그 자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오히려 불이행(Unterlassung)이라는 특성을 가진 열등성이라는 점에서다. 그 때문에 전술한 특성들은 개인무의식에서 원한이나 복수, 그리고 질투 등에서 들끓는 감정이라는 도덕적으로 뒤틀린 감정(Ressentiment속에서 유발되는 것이다.

 

 

2023.03.13 - [정신분석/융의 분석심리학] - Carl Gustav Jung(1875-1961)의 분석 심리학

 

Carl Gustav Jung(1875-1961)의 분석 심리학

Carl Gustav Jung(1875-1961)은 분석 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을 창시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 분석가입니다. 개신교 성직자의 아들로 스위스 케스빌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영적·형이상

psychologymind.tistory.com

 

 

2. 의식과의 관계에서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개인무의식은 의식과는 어떤 관계를 가질까? 집단무의식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의식이 가능한 개인무의식은 의식과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특성에서는 의식과 상당히 거리감이 있지만, 이것은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쉽게 떠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식과 매우 가까운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다. 물론 이런 특성은 어느 정도 깊은 무의식을 의미하는 '잠재의식'이나 '하의식'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도 한다.

개인무의식이 깊은 무의식과는 다른 점이라는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말한 '전의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에게서 전의식은 무의식에 해당되어 있으면서도 일정한 자극을 가하면 쉽게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무의식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1) 의식과의 관련성을 가진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개인무의식이 의식과의 상당한 관련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는 어떤 특정한 측면에 제한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무의식이 자극과 인지의 측면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지만, 특성적인 측면에서는 무의식의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무의식은 의식과의 가장 가까이 있고, 어떤 자극을 가하면 깊은 무의식과는 달리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런 특성은 개인무의식이 의식과 관련해서 동일한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특성이 가깝게 접근해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이 의식과의 관계적인 작용에서는 의식의 작용에서 중추적으로 역할을 하는 인식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인식이란 의식에 밀려드는 정신체계의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형이상학적, 또는 근본적으로 실제적인 것들의 형태에 상응하는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서의 개인무의식은 최근의 관점들도 선호되기도 하지만 정신의 체계가 의식과 일치하고 동일하다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것, 즉 인식론의 범위 내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식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해부학이나 생리학에서 눈이나 청각기관의 기능과 관련해 지각하는 것 이상의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바로 의식과 개인무의식이 가까우면서도 다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2)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존재적 방식

개인무의식은 특성적으로는 의식과는 다른 것이면서도 존재하는 방식에서 의식과는 확실히 다른 차이를 드러낸다. 물론 개인무의식이 의식과는 존재방식에서 다르다는 것도 사실상 특성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의식은 언제나 의식으로서의 특성을 지니지만, 개인무의식은 무의식으로서 그 특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무의식은 개인적인 것과 관련되어 유지된다는 점은 확고하다.

이런 특성은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류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특성과는 다른 것임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개인무의식은 의식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무의식적으로 의식이 가능한 부분과 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의식에서 불안이 더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더 이상 보편적인 인식론적인 한계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의식적인 정신작용과 분리시키는 단순한 의식의 문턱이 문제 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문턱과 무의식이라는 가설은 모든 인식의 불가결한 원료, 즉 정신적인 반응들, 심지어 무의식적 '사고'와 '인식들'이 직접 의식의 곁에, 그 아래에, 혹은 그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무의식은 단지 의식의 '문턱'에 의해서는 우리와 분리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무의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신체계이면서 추측이 가능하기에 의식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즉 지각, 통각, 기억, 환상, 의지, 정감, 감정, 숙고, 판단 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지 잠재의식의 형태에서 갖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의식의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그 내용의 강도, 즉 그 에너지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이는 정신에서 특정한 강도를 지닌 자극이 의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듯이, 또한 그 밖의 정신적인 내용도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특정한 강도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가정할 수 있다.

 

3) 의식과의 기능적인 차이

의식과 개인무의식은 존재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차이는 대개 그것이 가진 특성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의식과 개인무의식의 차이는 그 내용만 아니라 기능에서도 차이가 난다. 의식에서 일어난 감각능력이 의식적인 것이지만, 때로는 더 깊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일 수 있는 지각이나 표상, 기분의 움직임, 욕구와 같이 다양한 작용 방법과 등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의식과 개인무의식은 상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지각 능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것도 엄격하게 말하면 일정한 관계적인 측면에 제한되는 것이지만, 그 상태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의식과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은 그 기능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평형을 이루는 힘에 장애가 생기면 모든 무의식적 과정은 작용을 일으켜 생명체의 전반적 상태를 변화시키며, 별도의 감각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것의 차이는 우리가 모르지 않는데, 의도적이지 않는 행동이 있고, 하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의도적인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순간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인 생각이고, 다른 순간에는 의식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인데, 그 자체는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다른 때는 무의식적으로 진행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는 동일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의식은 논리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무의식은 초논리, 또는 비논리로 행한다는 점이 크게 구분되는 부분이다.

 

3. 집단무의식과의 관계에서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das kollektive Unbewusste)은 정신의 특성에서 도저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없는 특성들이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종족에서 출현하여 인류가 보편적으로 소유하여 온 것으로 인간을 특징을 짓는 정신의 특성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것은 대개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에 집단적인 심상(心像)이라고 해야 할 특성의 것들이다. 이로 인해 정신에서 집단무의식의 상은 대개 고태적인 신의 표상이나 원형적인 상들이다.

이때 원형(Archetypus)은 원상(Urbilder)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개인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의 것들이기에 원형적인 특성은 태곳적인 것들이거나 원시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개인적이 아닌 것, 유전된 범주나 원형의 형태로 집단적인 것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과의 관계를 논해야 한다.

 

1)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에서 생성의 차이

개인무의식은 성격에서 집단무의식과 차이를 보인다.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하여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구분하고 있다. 개인무의식은 사람이 태어나서 무의식에 쌓인 것으로 후천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개인무의식은 개인이 살면서 경험한 것들이 정신에서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된 것이다. 이런 것은 대개 개인의 어두운 인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어떤 이유로든 잊어버린 것이거나 이루지 못한 소망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나버린 생각들, 그리고 고의로 눌러버린 생각들이다.

이런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인격에 해당하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특성으로 개인에게서는 대개 거부되는 편이다. 이런 개인무의식의 특성은 무의식의 생성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집단무의식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대개 정신적으로 유전된 것들이다. 그러니까 집단무의식은 사람이 태어난 이후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난 인류의 보편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누구나 뱀을 보면 누구든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은 뱀을 처음 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우리는 뱀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도 왜 뱀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인가. 여기에는 선조가 뱀에 대하여 그런 부정적인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후손에게 정신적으로 유전되어 온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집단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는 달리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련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이다. 이것은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 마음속의 종교적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집단무의식은 전혀 개인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신적인 특성들이다.

 

2)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존재적인 차이

일반적으로 존재의 차이란 그것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집단무의식은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물론 융은 집단무의식이 부정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두 긍정성으로 되어 있다고만 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정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무의식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프로이트에게서는 무의식이 억압된 것이라는 부정성을 의미했지만, 융에게서는 그 가능성을 본다는 점이 뚜렷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집단무의식에는 떼어버리거나 없애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며, 창조적 가능성은 지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를 체험하여 의식에 동화하는 사람은 모두 인류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된다. 문학가가 무의식에서 어떤 단서를 잡아내어 다듬으면 높은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미술가가 거기에서 그림을 끄집어내면 유명한 화가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집단무의식과는 달리 개인무의식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들 수 있다. 그림자는 인격에서 어두운 부분이다. 인간의 인격에는 이런 어두운 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융은 인간의 심성이란 완전히 빛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많은 그림자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실제 분석에서 얻게 되는 통찰은 종종 괴로운 것이 된다. 이런 것은 대개 개인에게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심성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전에 일어나는 어두운 인격을 허용해 왔다면, 그럴수록 통찰은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러기에 새롭게 얻은 통찰을 마음에 깊이 두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심지어 너무 많이 가슴에 담아두어서 무의식의 그림자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낙심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며 이제는 어느 것 하나 옳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부정성이 강한 사람은 이런 것과 상관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개인무의식이 집단무의식과는 달리 인격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3)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의 기능적인 차이

개인무의식은 의식에 직접적으로 역할을 하여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편협함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에서 심리적인 갈등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지나친 낙관주의자를 열광적인 성향이라고 보고, 비관주의자를 소심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도 심리적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의 갈등이 어떤 경우에는 축소된다고 해도 그 본질적인 것은 한 편의 오만함과 소심함이라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둘의 공통점은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확실성이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자신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다. 이런 것은 흥미롭게도 그 배후에는 모두 열등감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불확실성은 진실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그에 대한 추종자를 끌어 모음으로써 자신의 확신의 가치와 신빙성을 보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다.

반면 소심한 자는 자기 속으로 후퇴하고 자신을 숨기면 숨길수록 자신의 내부에서는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은밀한 욕구가 고조된다. 비록 그는 자신의 열등성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속으로는 믿지 않는다. 자신의 내부에서 인정받지 못한 가치에 대한 오기에 찬 확신이 그에게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사소한 비난에 대해서도 신경질적이 되어 항상 오해받은 자의 표정과 자기의 정당한 요청에서 마음이 상한 사람의 표정을 나타낸다.

다만 이런 경우에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에는 적당한 자극이 주어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런 것들이 의식에 떠올라 의식에서 인정되어 받아들이면 그들에게는 인격의 확대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개인무의식에 집단무의식에 가해지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 집단무의식을 혼동하여 개인무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인격의 혼란이 초래되어 심각한 질병을 유발하게 된다. 신경증이나 자기 팽창은 모두 이런 집단무의식을 구분하지 못하고 개인무의식으로 혼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집단무의식은 개인이 혼동하여 수용한 결과로 일어난 것이지 반드시 그런 질병의 원인이 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집단무의식은 창조의 원천이 되기 때문인데, 실제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이런 무의식을 끌어내어 창조적으로 조탁(彫琢) 한 결과로 볼 수 있다.

 

4.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무의식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서 기술했다. 융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하여 무의식의 넓은 세계를 열었다고 했다. 여기에 개인무의식은 선천성을 갖는 집단무의식과는 달리 후천성을 갖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무의식이 개인의 경험과 관련되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상당히 후천적인 특성이 저장된 정신적 특성이라고 보아야 했다. 다시 말하면 개인무의식은 개인이 생활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정신의 특성이 무의식에 축적되어 정신의 기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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