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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아내와 자녀

정신분석/프로이트 정신분석

by 셀리스트 2023. 3. 3.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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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아내와 자녀

마르타 베르나이스(1861~1951)의 부모는 명성이 매우 자자한 유태인 가문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시점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그의 구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치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프로이트와의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르타의 어머니는 경제적인 재력가를 딸의 신랑감으로 원했던 것이다.



초조해진 프로이트는 그녀의 허락을 얻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겪어나가야만 되었다. 하루 빨리 유명해져서 결혼 승낙을 받아야만 한다는 그의 초조감은 결국 코카인 실험에 몰두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욕심이 친구 플라이슐-마르코프의 약물중독에 의한 죽음까지 초래하게 되자 프로이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구혼 과정은 비교적 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이후의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는데,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수많은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의 사회적 위치로 보아 이미 공인이 된 프로이트 부부의 처신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타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은폐시키는 전략을 택하면서 유대교 랍비의 후손답게 아내는 남편의 내조에 헌신해야만 한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히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자녀들

프로이트는 모두 3남 3녀의 여섯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를 포함한 아홉 명의 대식구가 한 집에 살았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큰 분란은 없이 살았다. 사회적 편견과 핍박 속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유태인 가정 특유의 위기의식과 피해의식이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 라는 일체감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자녀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관대한 아버지였다. 오히려 마르타의 잔소리가 집안을 통제하고 이끌어갔다고 볼 수 있다. 여섯 자녀 중 유별나게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특출난 인물도 없었다. 자녀들 중에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지명도를 얻은 사람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매우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다만 막내 에른스트의 아들이자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앙 프로이트는 지금까지 영국이 자랑하는 현대 최대의 화가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다

 


차녀 소피 프로이트(1893~1920)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녀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죽음은 프로이트에게 그의 생애 중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안나에 못지않게 소피에 대한 프로이트의 사랑은 매우 각별했는데, 소피의 죽음 이후 프로이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막내딸 안나에게는 언니 소피의 존재가 가장 부담스러운 경쟁 상대였는데 소피의 불행한 죽음 이후로 안나는 오랜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어깨에 양 날개를 단 듯이 의욕을 되찾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걷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선택한 길은 다름 아닌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성장

프로이트는 성장 중 유태인 신분으로서 온갖 차별과 모멸감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성장한 이후에는 모라비아의 민족적 영웅 이름에서 딴 자신의 이름 지기스문트를 버리고 독일 전설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 지그문트로 바꾸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학창시절부터 자신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동시에 시민권도 얻을 수 없다는 부당한 현실 앞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쓰고 있다.

 

 

다행히도 유대인의 대학 입학은 허용되던 시기라 프로이트는 자신이 원하던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은 인종적 차별의식은 생각처럼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창시절 독일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함을 보였지만 학업에서는 항상 일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노력했고, 정기적으로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들 일기, 편지, 논문 초안 등을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그 사실을 아내에게 보고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가를 호소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막내딸 안나가 태어나던 해부터 철저히 자기 분석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당시 이미 성공한 개업의로서 그리고 행복한 결혼생활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감, 증오심, 위통과 심장 발작 증세 등에 시달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공황장애 증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학 시절에도 그는 교내 건물의 둥근 원주 기둥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이러한 불안 발작을 경험했다고 한다. 역동적으로 본다면 프로이트는 거대한 남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 사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거세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기하게도 1896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집중적인 자가 분석을 통한 부분적 통찰에 의해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그런 증상들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는 아버지 장례식 참석마저 지각하는 실수를 보였는데 이발소에 들렀다 가느라고 늦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징벌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주로 자신의 아동 기 경험을 회상하고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소망,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 조카 파울리네에 대한 새디즘 및 그녀의 오빠인 존에 대한 경쟁심, 자신의 유모에 의한 수치심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 동생 알렉산더에 대한 살해 욕구 등을 통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1897년 가을부터 1898년 여름까지에는 그러한 통찰을 자신의 신경증과 교우관계, 자신의 직업 문제에 적용시켜 자기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신경증적 경향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바로 그 점을 밝힌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의 이론을 손쉽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경증적 기원을 규명하고 환자들의 무의식세계를 탐색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심층 구조를 밝혔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인류 지성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비록 모든 인류를 신경증 환자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에 각자 주목해본다면 그의 주장이 한낱 헛된 망상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성장

프로이트는 성장 중 유태인 신분으로서 온갖 차별과 모멸감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성장한 이후에는 모라비아의 민족적 영웅 이름에서 딴 자신의 이름 지기스문트를 버리고 독일 전설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 지그문트로 바꾸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학창시절부터 자신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동시에 시민권도 얻을 수 없다는 부당한 현실 앞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쓰고 있다.

 

다행히도 유대인의 대학 입학은 허용되던 시기라 프로이트는 자신이 원하던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은 인종적 차별의식은 생각처럼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학창시절 독일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함을 보였지만 학업에서는 항상 일등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노력했고, 정기적으로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들 일기, 편지, 논문 초안 등을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그 사실을 아내에게 보고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가를 호소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막내딸 안나가 태어나던 해부터 철저히 자기 분석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당시 이미 성공한 개업의로서 그리고 행복한 결혼생활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감, 증오심, 위통과 심장 발작 증세 등에 시달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공황장애 증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학 시절에도 그는 교내 건물의 둥근 원주 기둥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이러한 불안 발작을 경험했다고 한다. 역동적으로 본다면 프로이트는 거대한 남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기둥 사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거세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기하게도 1896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집중적인 자가 분석을 통한 부분적 통찰에 의해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그런 증상들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는 아버지 장례식 참석마저 지각하는 실수를 보였는데 이발소에 들렀다 가느라고 늦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징벌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주로 자신의 아동 기 경험을 회상하고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소망,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 조카 파울리네에 대한 새디즘 및 그녀의 오빠인 존에 대한 경쟁심, 자신의 유모에 의한 수치심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 동생 알렉산더에 대한 살해 욕구 등을 통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1897년 가을부터 1898년 여름까지에는 그러한 통찰을 자신의 신경증과 교우관계, 자신의 직업 문제에 적용시켜 자기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신경증적 경향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바로 그 점을 밝힌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의 이론을 손쉽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경증적 기원을 규명하고 환자들의 무의식세계를 탐색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심층 구조를 밝혔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인류 지성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비록 모든 인류를 신경증 환자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에 각자 주목해본다면 그의 주장이 한낱 헛된 망상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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