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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경계혼란(Contact Boundary Disturbances)[게슈탈트심리치료]

임상심리학/심리치료

by 셀리스트 2023. 4. 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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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경계혼란
[게슈탈트심리치료]
(Contact Boundary Disturbances)


개체는 유기체-환경의 전체 장으로부터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개체의 모든 활동은 항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며, 게슈탈트의 형성과 해소[파괴]도 환경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개체와 환경의 교류와 접촉은 '접촉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접촉경계'란 개체와 환경 간의 경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정된 공간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체와 환경이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경계는 항상 움직이며 유동적인데, 이는 두 '극(pole)'을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만나게 해 준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도 '경계'는 매우 중요하다. 각자 자신의 영역이 타인의 영역과 구분되는 경계가 있어야 서로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다.

만일 '접촉경계혼란'에 의해 서로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 서로 잘 접촉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성장에 장애가 생긴다.

 
건강한 개체는 접촉경계에서 환경과 교류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를 열어 받아들이고, 환경에서 들어오는 해로운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닫음으로써 이들의 해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나 경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이러한 환경과의 유기적인 교류와 접촉이 차단되고 심리적·생리적 혼란이 생긴다. 이것이 '접촉경계혼란'이다.

 
'접촉경계혼란'은 개체와 환경 간의 경계가 너무 단단하거나 불분명해질 때, 혹은 경계가 상실될 때 생긴다.

어떠한 경우이든 접촉경계혼란은 개체와 환경의 유기적인 접촉을 방해하며, 따라서 개체는 '미해결과제'를 쌓게 되어 마침내 환경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는 데 실패한다.

이런 맥락에서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모든 정신병리 현상은 항상 '접촉경계혼란'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본다."

 
펄스는 접촉경계혼란이 일어나는 형태로서 내사, 투사, 융합, 반전, 자의식의 5가지를 들었고, 어빙 폴스터는 여기에서 자의식을 빼고 편향을 추가시켰다. 이렇게 내사, 투사, 융합, 반전, 자의식, 편향의 6가지를 '접촉경계혼란 행동' 이라고 부른다.
 

1. 내사 (Introjection)
개체는 환경과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이를 소화하고 동화시킴으로써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이때 개체는 그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격성을 사용하여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의 구조를 파괴시켜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놓는데, 펄스는 이를 '치아 공격성(dental aggression)'이라고 불렀다.

'치아 공격성'은 음식물 섭취행동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유아는 어머니의 젖을 그냥 빨아 삼키지만, 차츰 이가 나면서부터는 음식물을 씹어 먹는다. 즉, '치아 공격성'을 사용함으로써 음식물을 '파괴'하여 신체의 일부로 '동화'시킨다.

만일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면 음식물은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고 결국에는 병을 일으키고 만다.

이러한 원리는 음식물 섭취행동뿐 아니라, 개체와 환경 간의 관계방식에서도 중요하다. 예컨대, 개체는 부모나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 가치관을 자기 나름대로 '따져' 보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치아 공격성을 사용하여 외부로부터의 이물질을 파괴하여 자기 것으로 '동화'해야 한다. 그런데 개체가 환경으로부터 이러한 자신의 공격성을 사용하는 것을 제지당하게 되면 권위자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것으로 동화되지 못한 채 이물질로 남아 있으면서, 개체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행동방식이나 가치관을 '내사(introjection)'라고 말한다.

개체는 내사로 말미암아 고정된 부적응 행동패턴을 개발하고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게 되면 개체는 매순간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다양한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내사'된 것들의 명령에 따라 그것이 자기 자신의 삶인 줄 잘못 알고 살아간다.

예컨대, 부모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도덕률을 지나치게 많이 내사한 개체는 그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고, 내사된 규칙과 도덕적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한다.

그렇게 되면 이물질을 파괴하고 동화시키는 데 사용되어야 할 '공격성'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여 자신을 괴롭히거나, 혹은 외부로 투사되어 편집증적 공포심을 갖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Perls).

내사의 실례라고 할 수 있는 '착해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튀지 마라' '얕보이지 마라' '남을 믿지 마라' 등은 대부분 사회행동과 관련하여 개체의 자율적인 행동을 억누르는 '초자아'의 명령이다.

내사가 심한 개체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 채 타인의 기대에 따라 맞추어 사는데 익숙해 있다. 이들의 행동은 흔히 조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하다. 천천히 씹으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타인의 것들을 그냥 '받아 삼키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고 책임지기보다는, 권위 있는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바라며,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흔히 자신의 욕구와 무관하게 나타난다.

"즉,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까를 더 의식하면서 행동한다."
 
그들은 대체로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은 받지만, 내면세계는 축적된 '미해결과제'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 내사된 도덕적 명령들과 이에 반발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서로 싸우는 이른바 '자기 고문 게임'에 빠지거나, 혹은 내사된 것들을 타인에게 투사하고서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내사는 자신과 타인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접촉경계혼란'을 초래하고, '미해결과제'를 증가시켜서 결국 개체를 부적응상태에 빠뜨린다.

펄스는 '좋은 부모'란 개체가 환경과의 적응과정에서 만족스럽게 욕구를 충족하면서 자신을 실현시켜 나가도록 촉진시켜 주는 부모 태도의 측면이고, '나쁜 부모'란 개체로 하여금 자신과 환경에 대해 파괴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부모 태도의 측면이라고 했다.

모든 부모들을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로 양분할 수는 없다. 부모들은 모두 양쪽 측면을 다 지니고 있는데, 차이는 단지 어느 쪽을 더 많이 가졌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부모의 태도를 어떻게 지각하고 받아들였느냐 하는 측면도 중요하다.

신경증은 개체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 즉 '경계장애'라고 말할 수 있는데, 내사도 이런 점에서 대표적인 경계장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치료란 어느 것이 자기이고, 어느 것이 자기가 아닌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개체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개체로 하여금 다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심리치료는 부모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바꾸어주는데 상당한 비중을 둔다. 즉, '새로운 부모 이미지 심기(reparenting)'를 강조한다.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내사가 심한 내담자들에게서 나쁜 부모의 이미지와 결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쁜 부모 이미지 분리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사는 다른 접촉경계혼란의 기본이 된다. 즉, 내사는 우리의 뇌에 입력된 일종의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서 개인이 겪는 모든 접촉경계혼란에 다 관여되어 있다.

예컨대, 투사나 융합, 반전, 자의식, 편향 등에 모두 관여하면서 그것들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른 접촉경계혼란을 다룰 때, 반드시 내사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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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투사 (projection)
내담자는 자신의 생각/욕구/감정 등을 타인의 것으로 지각하거나 책임 소재를 타인에게 돌리는데, 이러한 현상을 '투사(projection)'라고 부른다.

예컨대, 자신이 타인에 대해 애정이나 적개심을 갖고 있으면서, 오히려 타인이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지각한다거나,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타인이 자기를 그렇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체가 자신의 욕구/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자각하고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에 대한 책임 소재를 타인에게 돌림으로써 나타난다.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투사'의 범위를 정신분석에서보다 좀 더 넓게 잡는다.

즉, 현실왜곡이 병적으로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도 선택적 지각현상이 일어나면 투사로 본다.

1) 개체가 투사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는 것보다 고통을 덜 받게 되기 때문이다. 즉, 개체가 자신 속의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을 '부정'해 버리고, 그것들을 타인의 것으로 돌려 버림으로써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Clarkson, 1990).

2) 또한 투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예를 들어, 자신의 공격성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투사하는 내담자의 경우, 투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성을 방어하는 동시에 타인을 매개로 하여 이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Horney, 1991).

폴스터 등은 투사가 '내사'의 영향에 의해 생긴다고 말한다.

즉, 개체에 내사된 가치관이나 도덕적 규범이 개체로 하여금 그의 특정한 욕구나 감정 혹은 생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타인의 것으로 지각함으로써 해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고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실제는 그 사람 자신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일 수가 있는데, 이는 자신이 타인에 대해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내사의 영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투사한다는 것이다.(Polster & Polster, 1974)


대인관계 갈등은 흔히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나타난다. 즉, 우리는 악을 자신의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타인을 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과 대립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보다는 타인과 싸우는 것이 쉬우며, 우리 자신의 악과 대치하는 것보다는 악마에 대항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주의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위장하고 있는 것일 수 있으며, 독재자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사람의 내면에 독재자의 성향이 꿈틀거리고 있을 수도 있다.(Clarkson, 1990)
투사, 그 자체가 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투사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심리를 근거로 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투사 행위를 모르고 있을 때 발생한다. 즉, 자신의 악을 타인과 환경에 투사하여 싸우거나, 자신 속의 잠재력과 창조적인 힘을 타인이나 기타 외부 대상에 투사해 버릴 때 생기게 된다.

특히 종교현상에서 나타나는 투사의 문제는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와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투사와 관련된 종교현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니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을 억압하고, 이를 외부의 대상들에다 투사하여 그것에 악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이러한 억압된 부분을 '우리의 내면에 있는 야수(das innere Vieh)' 혹은 '그림자(Schatten)’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야수' 혹은 '그림자'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로서 ‘야성(野性)'을 뜻하는데, 이는 바로 인간 삶의 원동력이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원이라고 했다.

융도 이러한 투사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니체의 견해와 많은 유사점을 보였는데, 특히 그의 '그림자'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니체와 함께 그는 개체로부터 수용되지 않는 인격의 부분을 '그림자'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투사는 개체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견해를 흐리게 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저해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우리의 내면세계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에 대해 관심을 많이 보였는데, 특히 '대속(代贖)'의 의미를 투사와 관련시켜 해석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의미는 우리의 죄를 밖으로 투사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때 자신의 죄를 밖으로 투사해 버림으로써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욕구/행동이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좀 더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가면서 우리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좋든 싫든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더 이상 병적인 투사에 의해 내적·외적 갈등과 대인 갈등에 빠져들지 않고, 실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투사'는 자신의 유기체적 욕구를 자각하고 접촉하며 해소하는 과정을 방해할 뿐 아니라 타인과의 접촉도 방해한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나의 생각, 나의 욕구로 상대편을 지각하게 만듦으로써 타인들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타인과 진정한 접촉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내부를 먼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연인이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사람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긍정적 속성을 투사하고서 상대를 쫓아다닌다. 이때 그들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투사물(긍정적 속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는 얼마 못 가서 실망과 짜증을 초래한다. 따라서 건전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내적 측면들을 골고루 접촉하고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투사를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접근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지각과 거꾸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내담자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 치료자는 거꾸로 내담자에게 내담자 자신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말하게끔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내담자가 자신의 증오감을 접촉할 수 있게 되면, 다음 단계로 그 사람에게 말한 내용을 다시 구체적으로 이유를 들어 설명하도록 시킨다. 그렇게 하면 내담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공격성'을 접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투사를 심하게 하는 내담자의 경우 대개 자아경계가 경직되어 있고 타인과의 교류나 접촉이 별로 없으며 피해의식도 많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감이 없고 타인의 이목에 지나치게 예민하며, 심한 방어를 보인다.

이러한 내담자의 투사를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유기체 및 타인과의 접촉을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는 내담자와의 '신뢰감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치료자는 내담자의 시각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즉,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는 과정을 통해 단계적으로 신뢰감을 형성해 주어야 한다. 상호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게슈탈트 기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 융합(confluence)

융합이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간에 차이가 없다고 합의함으로써, 자신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 사이의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자신의 경계를 갖지 못한 상태)


펄스는 '융합(confluence)'이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간에 차이점이 없다고 느끼도록 은연중에 합의함으로써 발생하는 '접촉경계혼란'이라고 말했다.

즉, "친구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자기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친구가 불행을 느끼면 자신도 함께 불행을 느끼는 마치 일심동체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지극히 위해 주고 보살펴 주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의존관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자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편을 놓아주지 않고 붙들고 있는 상태라 하겠다.

폴스터와 폴스터(E. Polster & M. Polster, 1974)는 '융합'은 두 사람 간에 서로 다투지 않기로 계약을 맺은 것과 같은 상태라고 정의했다. 즉, 명시적인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서로 지켜야 하는 약속과 같은 것이라 했다.

그들은 평소에는 이러한 계약의 존재를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계약 당사자간에 어느 한쪽이 실수에 의해서 혹은 고의로 계약을 위반하면 서로 간에 계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융합관계는 주로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간에 많이 발견되지만, 오랫동안 사귄 친구 사이나 혹은 개인과 소속단체 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다.

융합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태아와 어머니의 관계에서처럼 서로 간에 경계가 없다.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착각하며 산다. 그들은 자신의 개체성을 희생하여 마치 '우리'라는 보호막 속에 들어가 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러한 관계를 깨뜨리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자신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간에 어떤 갈등이나 불일치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길들여진 관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행동은 금기로 되어 있다.

펄스(1951)는 융합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서로 아무런 새로움도 없이 그냥 서로에게 매달려 진부하고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융합으로 인하여 자신의 경계를 갖지 못할 때, 개체는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제대로 '전경'으로 떠올려 해소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러한 삶은 '미해결과제'를 계속 축적시킨다.

흔히, 융합관계는 공허감이나 고독감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고, 또한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즉, 융합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혼자 있는 것은 큰 공포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인과 융합하는 것이 고독감과 공허감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게슈탈트심리치료 초기에는 인생의 초기경험이 반영되는 두려움이 많이 나타난다. 집단치료 첫 시간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란 말로 시작하여 문장을 완성하는 게임을 시켜보면, 내담자들의 이러한 두려움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때 융합을 보이는 내담자는 흔히 “여러분이 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와 같은 말을 하고, 삼킴을 당하는데 대한 공포감을 가진 사람은 "여러분이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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